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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16 10월 15일
  2. 2007.10.16 드루 길핀 파우스트 신임 하버드 대학 총장 취임사

10월 15일

일기 2007. 10. 16. 11:53

 아침에 부는 바람은 찼다. 수영장 더운 물에 몸을 녹였다. 발을 오래차니 허벅지와 종아리가 당겼다. 어깨가 뭉쳐 접영이 되질 않았다.

 불안하고 불운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위태로웠고 백척간두에 서있는 듯했다.  인간이 지당하게 받아야 할 갖은 사회적 배려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시대였다. 일을 하다 영문동 모르게 일을 잃은 사람과 내세에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년의 말은 비참하지만 요즘의 말이었다.

 『부서진 미래』라는 책은 사람들의 말을 다룬 책이다. 그 말은 신산했고 처절했고 시급한 말이었다. 책 속의 글은 사람들의 말을 옮겨 적은 것이었다. 글은 말을 옮겨 적어 부박했지만 읽는 이를 망연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당면한 사람들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말이었다. '나'의 말은 하나도 없었다.

 책을 읽다 머리가 먹먹해진게 한 두번이 아니다. 제목 그대로 머리가 부서지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었다. 국가가 사람들을 이렇게 하찮게 대하고 여겨도 되는 것인가 생각했다. 로크나 맹자의 혁명을 가져다 적용할 계제가 아니었고, 줄창 욕을 퍼부어도 시원찮았다. 이것이 우리들의 '오지 않음(未來)'인가. 나는 읽으며 오지 책 속의 말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책 속의 말은 온 말이었다.

 나는 신자유주의를 누가 발명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말의 외적 찬란함을 등지고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인간소외를 목격한 적이 있는지 그 발명가에게 묻고 싶다. 죽은 자라면 관을 파내 뼈를 붙잡고 묻고 싶다.

 사람이 홀대되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신자유'인가. 짧은 머리에서 '자유'의 말만이 오갔다. 신(新)은 새로움을 뜻하는 접두사일 터. 그렇다면 새로운 자유는 내가 아는 자유와 대립되는 신조어일 것이었다. 인간이 천하게 여겨지고,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이 돈 앞에 무력한 것이 신자유가 뜻하는 바일 것이라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며 문득, 글이라는 것을 쓴다고 하는 나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 글은 힘이 없었고 울림이 없었으며 현실사회의 치열한 문제를 담아내는 폭도 없었다. 사람의 말이 글에 앞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글 속 되바라진 수사와 낱말들이 전부 허공에 뜬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땅도 딛지 않았으며 허공의 낱말을 섬기느라 바빴다.

 나는 인간의 진화와 발전을 긍정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 긍정을 최근 들어 다시 생각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작금의 현실상황은 퇴보 내지는 과도기인가.

 책 속에 담긴 사람들의 말은 어려웠다. 머리가 짧고 배움이 부족함을 책을 읽으며 절실히 느꼈다. 이제 땅을 딛고, 딛은 땅 위에서 사람들의 말을 섬길 것이다.

Posted by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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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 대학들은 흑인 여성 유대인 이민자 등에게 확장된 시민권과 평등, 기회를 제공하는 상징이자 동력으로서 혁명을 함께했다. 오늘 내가 이 자리(취임식)에 선 것-그리고 이 연단에 있는 다른 분들도-은 불과 수년전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대학이 변화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20세기 중반의 대학에 비해서도 엄청나게 달라졌다는 점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고등교육의 잃어버린 황금시대를 열망하는 이들은 이른바 그 유토피아가 극소수를 위한 것이었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이제 대학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해서 존재한다. 하버드 등에서 시작된 이 혁명은 토머스 제퍼슨이 말한 바, 교육의 기회가 환경이 아닌 재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토대로 하고 있다.

고등교육이 그 자체로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인 계층 이동이나 평등을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학생에게 열려 있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의무를 받아들여야 한다. 비용 때문에 학생들이 열정과 꿈을 추구하는 것을 주저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고등교육에 대한 미국의 불안은 비용 그 너머에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대학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이해와 동의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데 있다. 대학의 의미에 혼란을 느낀 대중은 대학에 더 많은 ‘책임성(accountability)’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대학이 무엇을 위한 책임성을 갖는지를 정의하는 데서 이니셔티브를 쥐어야 한다. 우리는 대학생활이 창조하는 ‘부가가치’를 평가한다는 명목으로 졸업률, 대학원 입학 자료, 표준화된 시험 점수, 연구비, 교수 논문 게재율 등을 보고하지만 이런 조치들로는 성과 자체는 물론이고 대학이 가진 포부를 파악해낼 수 없다.

대학의 본질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 독보적인 책임성을 갖는다는 데 있지, 오직 현재 혹은 현재 위주로 국한된 것은 아니다. 대학은 다음 분기에 나타나는 결과나 졸업 때까지 학생들이 어떤 모습을 갖느냐와는 무관하다. 대학은 일생을 형성하고 수천년의 유산을 전수하며 미래를 결정하는 배움에 관한 곳이다. 대학은 때로는 대중의 당장의 우려나 요구와 충돌하더라도, 뒤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보면서 가야 한다.

하버드 안에는 90개 도서관과 고전, 역사, 문학 단과대학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지금의 특정한 필요에 맞게 도구화하는 것에 불편하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그 자체로” 추구하고자 한다. 글로벌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세기 동안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했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에게 학부 4년의 생활은 인생의 기본적인 질문을 아무런 속박없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다.

미래에 대한 책임은 우리가 지성은 물론 지리적 경계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한다. 학제간 차이가 좁혀지는 시대에 지식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연결고리인 초국가적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함께 기후변화를 겪고 있고, 같은 질병으로부터 고통받고 있으며, 같은 경제에 참여하고 있다.

하버드는 지구의 미래가 달려 있는, 날로 확장되는 지식의 원천이자 상징이다. 우리는 새로운 배움의 지형에서 적극적이고도 성찰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학생이나 교직원, 변호사나 물리학자, 언어학자나 사회학자만으로서가 아니라 대학의 시민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불확실한 세계를 살고 있지만 우리는 반세기 후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이 대학이 지닌 목적과 잠재력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같은 의무와 가능성을 포용하도록 하자. “하나로 묶어내자”는 정신을 공유하자. 그것이 무한한 특권임을 알고 기쁨으로 감당하자.


〈출처 www.harvard.edu〉

Posted by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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