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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것을 붙잡고 싶은 자의 끄적임'에 해당되는 글 52건

  1. 2009.04.15 그래요, 외롭습니다
  2. 2009.04.07 봄날, 폭발 혹은 배설

  그래요, 외롭습니다. 외로워서 사람들에게 기대를 뿌리고 바람을 뿌리고 원망을-바람과 원망은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뿌립니다. 오래 전부터였을 겁니다. 종시 외로워서, 외로움을 타서 혼자 있을 땐 쩔쩔 매다가 함께 있을 땐 그 외로움을 숨기려-외로움이 구차한 혹은 부끄러운 감정이라도 되는 양-쩔쩔 맵니다. 그러다 술에 취하기라도 하면 봇물이 터지는 거지요. 흘러넘칩니다. 다음날 깨서 돌아본 내 모습이란 끔찍하게도 부끄러워 또 홀로 침전해버리고. 이럴 때는 심연이란 말을 많이 쓰더군요. 심연이란 말을 곳곳에서 자주 쓰곤 하는 데 그 말의 깊이와는 별개로 너무 닳아버린 느낌이랄까요. 내 느낌이 적확하다면 한 세기도 채 가질 않아 그 낱말은 마멸되어 버릴 것 같습니다.

 

  술에 취해 시름하다 외로워하다 단재 신채호 선배-선배란 말의 친밀함이란 시공을 뛰어넘습니다. 애써 청하지 않고 이렇게 적어버리렵니다-가 적은 ‘我와 非我의 투쟁’이란 평론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그 글을 숙독하지는 않았습니다. 스치듯 지나간 글이었지요. 그 제목 속에 묻어있는-글의 내용과는 별개로-외로움의 모습과 단재가 처했던 당대의 난망함을 떠올렸습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싸움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식민지 약소국의 혁명가의 외로움의 깊이와 표정은 어떠했을 지요.

 

  세상이 점차 포악해지고 약한 사람들을 쥐고 흔들 때마다, 저는 식민시대의 선배들을 떠올립니다. -그럴 때면 제 외로움은 제가 모를 어느 극지에까지 이르러 제어가 안 되는 궤도에서 혼자 분탕합니다- 그들이 대당하거나 길항했던 세계는, 그리고 그 세계를 극복하고 이루고자 했던 세계는, 그리고 그 세계의 모습과 어느 정도 부합한 내가 사는 이 세계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갈망으로 이룩한 오늘의 이 땅은 왠지 모를 외로움들이 넘실대는 넝마의 땅 같습니다. 서로 그 구차하다고 믿는 외로움들을 숨기려고 증오하고 모욕하고 싸우고 분노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 이 지나친 페시미즘을 용서하소서. 사랑과 연대, 배려, 희망 같은 긍정적 가치를 논외로 두자는 뜻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느낀 외로움의 감정은 매번 절망이거나 분노이거나 화였습니다. 아마도 성마르고 깎아지른 듯한 제 성미 탓 이겠거니 합니다. 그래요, 그것일 겁니다. 외로움을 말하려다 글이 이 지경까지 와버렸습니다. 어지르고 더럽혀놓고 늘어놓는 제 버릇은 글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무튼 말하려던 외로움을 가감없이 옮겨적기엔 이 글은 너무도 하찮군요. 머릿속 생각이나 인간의 삶을 그대로-한 티끌, 한 점도 빼지 않고 말입니다-옮겨적을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 때에 이르면 문학은 죽거나 박제품으로 남겨져 있을 것 같군요.

 

  그래요, 외롭습니다. 고독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밀려옵니다. 내가 인간임을 버겁게 알리는 이 공복감과, 창과 지붕을 때리는 저 빗방울에서도 외로움을 느낍니다. ‘삶은 본시 외로움 아니겠습니까.’ 이런 위로도 별무소용이군요. 결국 외로움은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가셔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요. 더운밥을 먹으면 외로움에 조금은 위안이 될는지요. 그도 모를 일입니다.

 

  어제 마신 술에서 오는 숙취로 고생합니다. 외롭습니다.

Posted by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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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같이 머릿속에 생각이 꽉 차 뭉쳐있는 날에는 머리를 한 번 비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머리를 털거나 비우거나 물로 게워 내거나 가셔내면 그 안 에서는 무엇이 나올까요. 봄빛은 찬란하군요. 내 머릿속 난마는 꼬여만 갑니다.


  무얼 적으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두 문단도 채 적지 못하고 이내 딴 짓을 벌였습니다. 무얼 적겠다는 것인지, 그것을 왜 적겠다는 것인지, 어떻게 적겠다는 것인지 하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적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생각’이란 녀석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쑤시는 날들이 연일입니다. 나는 무얼 생각하는 것일까요. 나의 생각 속 구상과 추상이 갈라지는 곳에서, 나의 현재와 미래는 오히려 아득하고 내가 돌아본 과거는 화끈거리며 낯 뜨겁습니다. 우매와 몰염치, 무계획에 수가 틀리거나 제멋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속으로 며칠을 앓곤 하는. 나란 인간의 미욱함이란 진작 알고 간파하고 있었겠습니다만, 봄의 기운에 그 ‘미욱함’이란 품성은 더욱 활개를 칩니다. 다스려지지도 않고 제어도 되질 않는 데 몸은 몸대로 또한 이 봄을 주체하질 못해서 운동이나 그도 아니면 갈피모를 수음으로 재워버리는 것이 상책일 뿐 나는 그 밖의 일들을 모릅니다.

 
  술을 마시면 되도 않을 세상 탓에 상식이 무너졌느니, '구체성이란 방법론‘이란 너무나도 아득한 말로 이 세계의 상식을 복원해야 한다고 일성을 합니다. 그러다가 또 떠나간 여차친구가 보고 싶느니 사랑에 겨워하는 그 순간에 세상에서 나란 존재가 사라졌으면 한다는 가소로운 생각을 술잔에 털어 입속에 우겨 밀어넣고는 합니다.

 
  ‘봄’이란 절기는 매해 거름 없이 올진대, 그러나 그 새로움은 인류역사의 수치나 삼라만상의 탄생과도 비길 것 아니겠습니까. ‘새로움’이란 추상에 ‘수치’란 구체를 비하는 짓도 우습기 짝이 없겠지만요. 인간이 누대에 걸쳐 이룩해온 문명이랄지 하는 것도 자연의 순리 앞에 비하면 턱없이 형편없을 것이니까요. 문명과 자연의 순리는 말하자면 주종이나 종속일까요. 자연의 순리가 주라는 사실은 재차 적을 필요도 없겠습니다.

 
  수 억의 인류 앞에 ‘나’란 사람은 점, 아니 티끌과도 같다고 해야겠습니다. 자연과 삼라만상에 댄다고 하면 생각하기도 불경한 하찮은 미물과도 같다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어째서 이 어리석고 미욱한 나는 거대와 세계와 체계 같은 내 삶에 감당 못할 것들을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어야 하는지요. 누가 시켜서 이러고 있다면 나 자신에 위안이나 연민이라도 지닐텐데 말이죠. 이것은 도무지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말이나 글은 삶에 비하면 가소로운 것’이란 박경리 선생님의 말씀을 굳이 원용해 오지 않아도 됩니다. 말과 글에 허덕이면서도 말에 주려있고 글에 갇혀 있는 이즈음의 나를 보면 헛웃음마저 납니다. ‘나는 대체 왜 이러고 있는가.’

 
  ‘있는가’란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모르니 그저 묻습니다. 답이 안 나올 물음을요. 오늘 이 글은 몸부림일 것입니다. ‘답 없는 답’을 향한 몸부림 말입니다.

 
  단문(短文)과 사설에, 고담준론에 갇혀 사는 이즈음, 오늘 내가 쏟아버린 이 글은 배설이나 폭발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생각을 비우겠다는 애초의 시도는 무위가 되어버렸습니다. 원고지도 다 적었습니다. <루쉰 소설 전집>을 마저 읽어야겠습니다.

  

Posted by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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