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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것을 붙잡고 싶은 자의 끄적임'에 해당되는 글 52건

  1. 2008.10.04
  2. 2008.10.03 그저,
  산은 터전을 마련해두고 사람을 기다렸다. 사람은 산이 마련한 터전에 빚을 내고 한 발 한 발의 보폭으로서 산에 올랐다. 산에는 디딜 곳, 쉴 곳, 마실 곳, 먹을 곳, 누울 곳이 모두 있었다. 산은 터전이었다. 사람은 터전에 올라 자신의 터전이, 터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찌나 사소한 지를 깨달아가곤 했다. 
 
  나는 한숨과 사념, 소외감들을 몸에 묻히고 산으로 가곤 했다. 산에서 나의 한숨과 사념, 소외감을 돌이나 바위에 묻히고 흙땅에 묻었다. 산에서 나는 말이 없었지만 산은 나의 침묵에 괘념하지 않았다. 내가 묻히고 묻어온 것들을 산은 다 받아줬다. 설사 나의 한숨과 사념, 소외감이 기화돼 공기 중으로 스며서 스민 것들이 다시 돌아 내 몸에 도로 스밀 지언정 나는 산에서 핍진한 내 몸을 뉘일 수밖에 없으리.

  가을 산에 단풍이 지기 시작했다. 북한산의 족두리봉과 안나푸르나의 빙벽이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산은 모두의 산이고 누구에게나 산이므로 족두리봉의 디딤발이나 안나푸르나의 한 보가 역시 같을 것이었다.

  대저 자연은 위대하고 사람은 위대한 자연 앞에 오만했다. 사람은 산에 '정복'이란 돼먹지 않은 낱말을 갖다 붙였는데 산이 사람을 받아 이룬 사람의 성취에 포장한 낱말이었다. '정복'이란 말의 쓰임이 자연인 산일 때 사람으로서 사람의 철 모를 역사는 부끄럽다.
 
  수 세기간 '정복'과 '등정'의 사이를 사람이 누렸다. 산은 말이 없었다. 산은 말 없이 사람을 받았고 사람은 제 꼴에 취해 산을 업수이 여겼다. 오늘 북한산을 밟는 수많은 인파의 바다 속에서 배출된 사람의 흔적들은 산에 불경해 보였다. 먹다 버린 음식 포장지와 과일껍질, 술병과 쓰레기 등속...줍지 못한 내 몸 뚱아리 역시 불경하기는 매 한가지였으나 산은 별 말 없었다.

  오늘 지보(遲步)로 북한산을 올랐다. 바위를 붙잡고 돌에 발을 디디며 올랐다. 산이 있어 다행이었고 나는 다복한 등정을 마쳤다.
Posted by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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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자존심을 니가 조금이라도 내게 내비쳤더라면,너의 말라버린 눈물을 내게 조금이라도 짜냈더라면,나에 대한 너의 못견딜 말들을 네가 내 앞에 풀어놓았더라면,"잘 살아."란 말보다"한번만 더."라는 말들을 내게 쏟아버렸다면,이 부질없는 말들을 내가 쓰지 않게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Posted by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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