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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같이 머릿속에 생각이 꽉 차 뭉쳐있는 날에는 머리를 한 번 비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머리를 털거나 비우거나 물로 게워 내거나 가셔내면 그 안 에서는 무엇이 나올까요. 봄빛은 찬란하군요. 내 머릿속 난마는 꼬여만 갑니다.


  무얼 적으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두 문단도 채 적지 못하고 이내 딴 짓을 벌였습니다. 무얼 적겠다는 것인지, 그것을 왜 적겠다는 것인지, 어떻게 적겠다는 것인지 하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적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생각’이란 녀석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쑤시는 날들이 연일입니다. 나는 무얼 생각하는 것일까요. 나의 생각 속 구상과 추상이 갈라지는 곳에서, 나의 현재와 미래는 오히려 아득하고 내가 돌아본 과거는 화끈거리며 낯 뜨겁습니다. 우매와 몰염치, 무계획에 수가 틀리거나 제멋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속으로 며칠을 앓곤 하는. 나란 인간의 미욱함이란 진작 알고 간파하고 있었겠습니다만, 봄의 기운에 그 ‘미욱함’이란 품성은 더욱 활개를 칩니다. 다스려지지도 않고 제어도 되질 않는 데 몸은 몸대로 또한 이 봄을 주체하질 못해서 운동이나 그도 아니면 갈피모를 수음으로 재워버리는 것이 상책일 뿐 나는 그 밖의 일들을 모릅니다.

 
  술을 마시면 되도 않을 세상 탓에 상식이 무너졌느니, '구체성이란 방법론‘이란 너무나도 아득한 말로 이 세계의 상식을 복원해야 한다고 일성을 합니다. 그러다가 또 떠나간 여차친구가 보고 싶느니 사랑에 겨워하는 그 순간에 세상에서 나란 존재가 사라졌으면 한다는 가소로운 생각을 술잔에 털어 입속에 우겨 밀어넣고는 합니다.

 
  ‘봄’이란 절기는 매해 거름 없이 올진대, 그러나 그 새로움은 인류역사의 수치나 삼라만상의 탄생과도 비길 것 아니겠습니까. ‘새로움’이란 추상에 ‘수치’란 구체를 비하는 짓도 우습기 짝이 없겠지만요. 인간이 누대에 걸쳐 이룩해온 문명이랄지 하는 것도 자연의 순리 앞에 비하면 턱없이 형편없을 것이니까요. 문명과 자연의 순리는 말하자면 주종이나 종속일까요. 자연의 순리가 주라는 사실은 재차 적을 필요도 없겠습니다.

 
  수 억의 인류 앞에 ‘나’란 사람은 점, 아니 티끌과도 같다고 해야겠습니다. 자연과 삼라만상에 댄다고 하면 생각하기도 불경한 하찮은 미물과도 같다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어째서 이 어리석고 미욱한 나는 거대와 세계와 체계 같은 내 삶에 감당 못할 것들을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어야 하는지요. 누가 시켜서 이러고 있다면 나 자신에 위안이나 연민이라도 지닐텐데 말이죠. 이것은 도무지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말이나 글은 삶에 비하면 가소로운 것’이란 박경리 선생님의 말씀을 굳이 원용해 오지 않아도 됩니다. 말과 글에 허덕이면서도 말에 주려있고 글에 갇혀 있는 이즈음의 나를 보면 헛웃음마저 납니다. ‘나는 대체 왜 이러고 있는가.’

 
  ‘있는가’란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모르니 그저 묻습니다. 답이 안 나올 물음을요. 오늘 이 글은 몸부림일 것입니다. ‘답 없는 답’을 향한 몸부림 말입니다.

 
  단문(短文)과 사설에, 고담준론에 갇혀 사는 이즈음, 오늘 내가 쏟아버린 이 글은 배설이나 폭발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생각을 비우겠다는 애초의 시도는 무위가 되어버렸습니다. 원고지도 다 적었습니다. <루쉰 소설 전집>을 마저 읽어야겠습니다.

  

Posted by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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