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문정우 국장은 해학을 머금고 산다. 얼굴은 장승같은데(좀 작은) 주로 너털웃음을 짓는다. 말을 하다 가끔 혀를 내밀기도 하는데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이 발칙한 인턴;;;) 혼자서 까무라친다. 글은 또 어찌나 재밌게 쓰시는 지…

  이제 그는 내 선배가 됐다. 까마득한 선배다. ‘기자님’에서 ‘선배’가 됐다. 인턴 이틀째날, 그와 마주했다. 인턴 여섯과 그. 꽤 어울리는 만남이었다.

  “왜 기자가 되고 싶습니까?” 대뜸 그가 물었다. 우리는 주저하며 답했다.

  “글 쓰는 게 좋아서요.”, “현장이 좋아서요.”라는 답들이었다.

  “오 마이 갓! 글 쓰는 게 좋다고? 그게 얼마나 지겨운 일인데. 평생 머리 아프고…”

  그가 되물었다. 이어 문정우 국장은 ‘리영희’교수 얘기를 꺼냈다.

  “리영희 교수가 말했다. ‘기자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더라.” 그는 전에 내게도 이런 덕담(문국은 덕담이랬다)을 건넸다. ‘기자하지 마.’라고. 결국 나는 인턴이나마 기자가 돼버렸고 그 역시…

  “리영희 교수가 ‘서울의 봄’ 직후 다시 강의(당시 한양대 신문방송학과)를 했다. 강의실엔 학생보다 기자들이 더 많았다. 근데 한국기자는 하나도 없더라. 외신기자만 바글바글했다. 한국의 지성이고 저항(의 상징)이라. 80년이면 박정희가 죽고 나서인데도 (한국기자는)무서워서…”

  문정우 국장은 당시를 회고했다. 회고인지 한숨인지 허탈함인지 피로감인지 분간이 어려운 회고였다.

  “변한 게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2008년(놀랍게도) YTN기자들도 해직되지 않았나. 우리고 그랬고. 쫓겨난 거지, 막말로(웃음).”

  잔인한 그 때의 기억을 그는 간명하게 정리했다.

  자리 말미에, ‘삼성’이 튀어나왔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당시 삼성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나요? <시사IN>은 요즘 삼성기사 안 씁니까?”

  내가 물었다. 뇌관을 건드린 셈이었다. 그는 흥분해서 말까지 더듬으며 답했다.

  “삼성 기사 안 쓴다. 쓰면 뭘 하나. 면죄부 쓰기 싫다. 아니,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딨나. 검찰을 비롯해 공정위, 금감위 이런 자본주의 감시의 틀이 전부 썩었다. 또 다른 감시 축인 언론도 썩긴 마찬가지다."

  그는 삼성의 저열한 대응도 말해줬다.

  “(삼성에서)나보고 그랬다. 기사만 빼주면 모든 것 다 해준다고. 진담인 듯싶더라. 나 이래봬도 모든 걸 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문정우 국장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찼다. 그는 삼성 관계자에게,  “내가 인쇄소 가서 기사 빼랴? 그러면 우리 기자들 또 거리로 나간다. 해주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삼성의 질긴 설득은 이 말 뒤에 그쳤다. 삼성 관계자는 물러갔고, 언론과 삼성의 묵계인 일보금지(一報禁止. 삼성비판 기사는 어떤 회사라도 먼저 쓰지 않겠다는 암묵적 합의)는 <시사IN>에서 깨졌다. 문국의 해학 뒤엔 삼엄함이 있었다. 그는 구태여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자인생은 그랬을 듯싶다. 그는 늘 웃지만 그 웃음은 풀어진 웃음은 아니었고 긴장과 경계와 원칙과 책임과 공신이 단단히 뭉쳐진 웃음이었다.

그는 교육 내내 웃음을 머금고 말을 했다. 나는 그의 말은 받아 적었지만 그의 웃음은 적지 못했다. 글로 적힐 웃음이 아니었다.

Posted by 이환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