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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부터 내 작은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나는 세상 물정에 어두워졌다. 세상이 참혹하고 모질고 비정하다는 따위의 풍문을 종이 위에 새겨진 활자 등을 토대로 추측할 뿐이었다. ‘세상은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이지러졌다, 한국전쟁 전후의 각종 대립만큼이나 격하고 팽팽한 대치상태다, 5공식의 겁박하는 질서로 도로 재편되어가고 있다’는 식의 풍문과 추측이었다.

 

 
  나는 9살 요크셔테리어 로즈의 배와 젖꼭지를 만지며 세상과 시절을 떠올렸다. 로즈의 생장과 세상의 흐름은 닮은 듯 하기도 했다. 로즈는 내가 저를 만질 때 바르르 떨거나 갸르릉 긴장하거나 짖었다. 집 안에서 나도 그랬다. 로즈와 나와 세상은 본디 하나의 점에서 나왔을 것이란 망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몸이 편해 머리가 고생이었다. 나는 그냥 놀지는 않았고 머리 쓰면서 놀았다.

 

 
   살이 늘었다. 몸이 불었다. 활개가 여북하고 거동이 생각만으로도 심란하다. 몸은 이미 ‘휴(休)’의 균형에 매어있다. 다시 ‘생(生)’이나 ‘활(㓉)’이나 ‘동(動)’하는 질서에 몸을 밀어 넣으려니 초조하고 우려스럽다. 그러나, 세상 꼴이 이 지경에 이를진대, 내 둔한 몸뚱이를 부려 목청껏 소리 한 번 지르는 일은 내 몸에나 세상에 미안할 짓은 아닌 듯싶다.

 

 
  가부좌나 틀고 있지는 않았지만 정말 이제는 몸을 부려야 할 때인가 싶다. 늘어진 몸보다 우려스러운 일들이 하나 둘 벌어지고 있다. 젊고 어린 나는 그 일들에 항거해야겠다. 양심이니 정의감이니 사명감이니 하는 낯 뜨거운 개수작의 말을 버리고, ‘저건 안 된다’하는 내 보배운 것에 입각해 움직일 것이다. 이것은 ‘봉기’보다는 ‘움트다’라는 표현이 좀 더 들어맞을 것 같다.

  

 
  세상 복판에서 상처받을 일이 잦을 것 같다. 나는 그저 품이 넓은 여자 품에 안겨 울다 다시 개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상처주고 상처받는 세상에서 웃는 일은 요원하리라. 나는 어렵게 산다.

 

 
  어쩌겠는가. 세상이 이 지경까지 된 것에는 내 책임도 없지 않음을 나는 안다. 내 생활적 죄과와 방관, 안면몰수의 죄는 속죄대상이다. 용서는 움직이면서 숨이 붙은 모두에게 구하련다.  (2008.12.22)

Posted by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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