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그래요, 외롭습니다. 외로워서 사람들에게 기대를 뿌리고 바람을 뿌리고 원망을-바람과 원망은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뿌립니다. 오래 전부터였을 겁니다. 종시 외로워서, 외로움을 타서 혼자 있을 땐 쩔쩔 매다가 함께 있을 땐 그 외로움을 숨기려-외로움이 구차한 혹은 부끄러운 감정이라도 되는 양-쩔쩔 맵니다. 그러다 술에 취하기라도 하면 봇물이 터지는 거지요. 흘러넘칩니다. 다음날 깨서 돌아본 내 모습이란 끔찍하게도 부끄러워 또 홀로 침전해버리고. 이럴 때는 심연이란 말을 많이 쓰더군요. 심연이란 말을 곳곳에서 자주 쓰곤 하는 데 그 말의 깊이와는 별개로 너무 닳아버린 느낌이랄까요. 내 느낌이 적확하다면 한 세기도 채 가질 않아 그 낱말은 마멸되어 버릴 것 같습니다.

 

  술에 취해 시름하다 외로워하다 단재 신채호 선배-선배란 말의 친밀함이란 시공을 뛰어넘습니다. 애써 청하지 않고 이렇게 적어버리렵니다-가 적은 ‘我와 非我의 투쟁’이란 평론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그 글을 숙독하지는 않았습니다. 스치듯 지나간 글이었지요. 그 제목 속에 묻어있는-글의 내용과는 별개로-외로움의 모습과 단재가 처했던 당대의 난망함을 떠올렸습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싸움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식민지 약소국의 혁명가의 외로움의 깊이와 표정은 어떠했을 지요.

 

  세상이 점차 포악해지고 약한 사람들을 쥐고 흔들 때마다, 저는 식민시대의 선배들을 떠올립니다. -그럴 때면 제 외로움은 제가 모를 어느 극지에까지 이르러 제어가 안 되는 궤도에서 혼자 분탕합니다- 그들이 대당하거나 길항했던 세계는, 그리고 그 세계를 극복하고 이루고자 했던 세계는, 그리고 그 세계의 모습과 어느 정도 부합한 내가 사는 이 세계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갈망으로 이룩한 오늘의 이 땅은 왠지 모를 외로움들이 넘실대는 넝마의 땅 같습니다. 서로 그 구차하다고 믿는 외로움들을 숨기려고 증오하고 모욕하고 싸우고 분노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 이 지나친 페시미즘을 용서하소서. 사랑과 연대, 배려, 희망 같은 긍정적 가치를 논외로 두자는 뜻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느낀 외로움의 감정은 매번 절망이거나 분노이거나 화였습니다. 아마도 성마르고 깎아지른 듯한 제 성미 탓 이겠거니 합니다. 그래요, 그것일 겁니다. 외로움을 말하려다 글이 이 지경까지 와버렸습니다. 어지르고 더럽혀놓고 늘어놓는 제 버릇은 글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무튼 말하려던 외로움을 가감없이 옮겨적기엔 이 글은 너무도 하찮군요. 머릿속 생각이나 인간의 삶을 그대로-한 티끌, 한 점도 빼지 않고 말입니다-옮겨적을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 때에 이르면 문학은 죽거나 박제품으로 남겨져 있을 것 같군요.

 

  그래요, 외롭습니다. 고독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밀려옵니다. 내가 인간임을 버겁게 알리는 이 공복감과, 창과 지붕을 때리는 저 빗방울에서도 외로움을 느낍니다. ‘삶은 본시 외로움 아니겠습니까.’ 이런 위로도 별무소용이군요. 결국 외로움은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가셔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요. 더운밥을 먹으면 외로움에 조금은 위안이 될는지요. 그도 모를 일입니다.

 

  어제 마신 술에서 오는 숙취로 고생합니다. 외롭습니다.

Posted by 이환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