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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10.27 2007 주사파 풍경
  2. 2007.10.16 10월 15일
#술자리.

모 시민단체 활동가 曰 "(종로구) 수송동에는 NL(민족해방) 술집이 많다. PD(민중민주)놈들이 여기와서 민족통일의 깊은 뜻에 젖고들 가곤 하지." 좌중 폭소.

NL, PD? 무슨 암호문 같다. 처음 들었을 땐 그랬다. 알고 보니 운동권 진영을 양분하는 계파들의 명칭이란다. 과거, 그들의 세는 컸다. 거의 모든 대학생들이 이 둘 안에 속했다. 지금도 그들은 유유히 이어졌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안엔 아직도 그들을 나눈다. 이를테면 저번 민주노동당 경선은 조직과 계파의 싸움이었다. 대선후보로 선출된 권영길 후보의 지지 계파가 NL이었다. 심상정 의원의 지지계파는 PD였다. 1차 예선에서 노회찬이 밀렸다. 노회찬 의원은 지지 계파가 없었다(그는 노회(老獪)하지 못했다) 대중적 인기로 따지면 그가 일등이었을 것이다. 이건 뭐 중요한 건 아니고...

NL은 주로 민족문제에 천착한다. 그들은 북이 멀지 않다. 가깝고 정겨워 한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던 그들이었다. 민족의 위도한 영도자 수령님(개뿔)을 동경했던 것이다. 백낙청 선생이(이 분은 주사파가 아니었다) 그들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PD는 주로 민중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노동자와 농민을 강조한다.

주사파는 주체사상파의 줄임말이다. 과거 정권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지금도 몇몇 음지에 숨어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만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선배들의 오판이었다고 생각한다. 대안이 그렇게 없었나 하곤 했다.

2007년 주사파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 역시 주로 대학에서 쓰이는데 일주일의 나흘을 수업 받는 애들을 두고 주사파라 한다. 주삼파, 주오파와 같이 쓰인다. 그러나 그 말은 사상적 그림자가 걷혔다. '주사파' 정도면 성실한 것이다. 나는 '주오파'다. 그러나 성실한 것 같지 않다. 주사파의 가벼움을 느끼며 요즘 아이들의 가벼움도 같이 느낀다. 역사도 철학도 문학도 다 멀리한다. 사회과학 서적은 끔찍해 한다. 깊은 고민없이 말초적 즐거움과 순간의 편함을 추구한다. 그 흔하던 '문학소녀, 문청'들도 보기 어렵다. 책을 읽어도 깊은 생각없는 '재테크, 처세, 일본의 대중문학' 정도다. 그마저도 읽으면 다행이라고 느껴진다.

대학생들의 잘못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의 탓이다. 이 사회를 휘감은 그 무엇이 깊은 고민과 성찰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일종의 음모론인가. 그렇지 않다. 실제 그렇다. 그 무엇은 '돈', '자본'이다. 돈의 힘은 막강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삼성'이 대표다. 삼성은 이미 언론계를 다스린다. 그들과 맞서려다 일터를 떠난 이들이 만든 매체가 <시사IN>이다. 이건 뭐 중요한 건 아니고...

삼성보다 더 막강한 적이 있다. 전 세계를 휘감은 '신자유주의'다. 이 녀석은 정말 세다. 당최 답이 나오질 않곤 있다. 양극화와 실업, 심지어는 국가 전체를 파탄내기도 한다. 몇몇의 학자와 사람들이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택도 없다. 힘에 부친다. 우리나라에 '신자유주의'가 그늘을 드리운 건 97년 외환위기 이후 였다. 당시 12살이던 나는 단순히 용돈이 줄고, 집에서 하던 비디오 가게가 어려워졌을 뿐이라고 느꼈다. 커서 그 시대를 보니 정말 장난 아니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글이 길어졌다. 아무튼 그렇게 됐다. 사람들은 당장의 밥벌이와 생계에 성찰과 고민을 뺐겼다. 돈을 벌기위해 마소처럼 일해야 한다. 그러나 생각만큼 돈이 잘 벌리지는 않는 것 같다. 일자리에서 떠날 무서움도 늘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비정규직이 올해 110만이나 늘었다고 한다. 치열하고 피터지는 경쟁의 장에 사람들이 놓여있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고 돈도 없다. 여유도 없다.

2007, 대학생 주사파의 성찰은 헐겁고 굶주렸다. 과거 주사파 선배들의 판단은 빗나갔을지언정 깊고 묵직했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수록 또 다른 주사파가 등장한다. '술 마시면 주사'를 잘 부린다는 '주사(酒邪)파'다. 주사는 늘 진상스럽다. 그러나 그들의 주사를 탓할 수만은 없다. 세상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Posted by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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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일기 2007. 10. 16. 11:53

 아침에 부는 바람은 찼다. 수영장 더운 물에 몸을 녹였다. 발을 오래차니 허벅지와 종아리가 당겼다. 어깨가 뭉쳐 접영이 되질 않았다.

 불안하고 불운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위태로웠고 백척간두에 서있는 듯했다.  인간이 지당하게 받아야 할 갖은 사회적 배려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시대였다. 일을 하다 영문동 모르게 일을 잃은 사람과 내세에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년의 말은 비참하지만 요즘의 말이었다.

 『부서진 미래』라는 책은 사람들의 말을 다룬 책이다. 그 말은 신산했고 처절했고 시급한 말이었다. 책 속의 글은 사람들의 말을 옮겨 적은 것이었다. 글은 말을 옮겨 적어 부박했지만 읽는 이를 망연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당면한 사람들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말이었다. '나'의 말은 하나도 없었다.

 책을 읽다 머리가 먹먹해진게 한 두번이 아니다. 제목 그대로 머리가 부서지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었다. 국가가 사람들을 이렇게 하찮게 대하고 여겨도 되는 것인가 생각했다. 로크나 맹자의 혁명을 가져다 적용할 계제가 아니었고, 줄창 욕을 퍼부어도 시원찮았다. 이것이 우리들의 '오지 않음(未來)'인가. 나는 읽으며 오지 책 속의 말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책 속의 말은 온 말이었다.

 나는 신자유주의를 누가 발명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말의 외적 찬란함을 등지고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인간소외를 목격한 적이 있는지 그 발명가에게 묻고 싶다. 죽은 자라면 관을 파내 뼈를 붙잡고 묻고 싶다.

 사람이 홀대되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신자유'인가. 짧은 머리에서 '자유'의 말만이 오갔다. 신(新)은 새로움을 뜻하는 접두사일 터. 그렇다면 새로운 자유는 내가 아는 자유와 대립되는 신조어일 것이었다. 인간이 천하게 여겨지고,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이 돈 앞에 무력한 것이 신자유가 뜻하는 바일 것이라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며 문득, 글이라는 것을 쓴다고 하는 나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 글은 힘이 없었고 울림이 없었으며 현실사회의 치열한 문제를 담아내는 폭도 없었다. 사람의 말이 글에 앞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글 속 되바라진 수사와 낱말들이 전부 허공에 뜬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땅도 딛지 않았으며 허공의 낱말을 섬기느라 바빴다.

 나는 인간의 진화와 발전을 긍정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 긍정을 최근 들어 다시 생각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작금의 현실상황은 퇴보 내지는 과도기인가.

 책 속에 담긴 사람들의 말은 어려웠다. 머리가 짧고 배움이 부족함을 책을 읽으며 절실히 느꼈다. 이제 땅을 딛고, 딛은 땅 위에서 사람들의 말을 섬길 것이다.

Posted by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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